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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勝俊玄 夕慧・朱 龍聲・洪 辰煊

 / Yoon Seung-jun・Hyun Dahye・Joo Yongseong・Jinhwon Hong

影絵遊び / 그림자놀이

 

2019.4.2(tue) - 4.14(sun)

Open 12:00-19:00 Closed Mondays

 

홍진훤

 

1986년 1월 28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챌린저호가 발사 73초 만에 폭발했고 탑승했던 7명

모두가 사망했다. 2001년 9월 11일에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자살 테러로 한순간 무너져내렸고 이 과정에

서 2,996명이 사망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산리쿠 연안 태평양 앞바다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지진이 일으

킨 쓰나미로 15,897명이 사망했다.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한 피해는 여전히 가늠조차 되지 않

고 있다. 이 참사들은 모두 생중계로 전세계에 전송되었고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미래가 잠시 유보되었

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한국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 가라앉는 배를 앞에두고 정부는 구조

하지 못했거나 구조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 모두는 TV를 통해 304명의 죽음을 생중계로 지켜봐야

했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르는 동안 무력과 불능의 감각은 모두에게 체화되었다. 죽음을 바라보는 공동의 경험

은 한 세계를 종료시켰고 새로운 세계를 추동했다. 그것이 누구도 꿈꾸지 않았던 미래라 하더라도.

 

네 개의 사진 덩이가 놓여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들이다. 죽음은 자연스럽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행위는 언제나 부자연스럽다. 그 부자연스러움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더 혼란스럽다. 죽음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의 것이기에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인 바라봄은 죽음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사진은 모든

것의 존재를 암시하며 부재를 증명한다. 그렇게 사진은 죽음을 생산한다. 그래서 죽음을 기록하는 행위는 가

장 사진적인 행위가 되기도 한다. 윤승준, 주용성, 현다혜, 홍진훤 네명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며 네 개의 죽음

을 천천히 바라보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했던 미래와 우리가 만든 과거의 간극을 사진 사이 느슨한 링

크를 따라 짐작해보고자 한다.

 

홍진훤의 사진에서 출발해보자. 무엇인가를 명확히 가리키지 않는 평평하고 밋밋한 풍경들이 반복된다. 어디

하나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시선은 사각의 주변을 맴돈다. 주인공이 사라지고 초라한 조연들만 남아버린 장

면들은 헛헛한 부재의 감각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이 사진들은 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향하던 제주의 풍경이다. 수학여행을 위해 제주로 향하던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과

선생님 262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작가는 수학여행 일정표대로 제주를 배회하며 누구도 다다르지 못한

풍경을 기록한다. 어떤 죽음은 당위의 실종이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감각은 분명 세월호 이후의 감각이다.

반복되는 진공의 사진들은 공동의 경험 위에서 거대한 죽음과 이어진다.

 

홍진훤의 사진이 무엇이 없음을 적극적으로 각인시키려는 시선이라면 작가 윤승준은 철저히 무책임한 관찰자

의 위치에 선다. 한국의 국도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폐업한 휴게소들을 찍은 이 연작 사진들에서 작가

의 시선은 무심한 여행객의 태도를 취한다. 휴게소는 화면의 상단에 위태롭게 배치되었고 정면성은 철저히 배

제되었다. 마치 차를 타고 지나가며 흘려 본 휴게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휴게’라는 낭만적인 단어

와 어울리지 않게 이미 건축물들은 모두 제 용도를 잃었고, 건축가이기도 한 작가의 시선에선 그 마지막을 담

담히 받아들이는 체념마저 읽힌다.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의 등장은 모두를 가속했고 세분된 마디를 거

대한 분절로 대체했다. 이 건축적 죽음 앞에서 작가는 애써 방관자의 위치로 내려가 작음과 느림의 소멸을 추

동하는 이 시대의 시선을 전유한다. 사진이 생산한 속도 유예의 풍경과 무책임한 관조적 시선은 어떤 죽음에

대한 작은 애도로 작동한다.

 

현다혜의 시선은 윤승준과는 조금 다른 관조의 위치에서 죽음을 바라본다. 4년 전 치매로 요양원에 입원한 할

머니의 모습을 담담하게 기록한 사진들은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하지만 기필코 도래할 가족의 죽음 앞에 서

있다. 치매는 기억의 죽음이다. 그것은 역사의 죽음이며 관계의 죽음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 죽음을 마냥 슬퍼

하기보다는 그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삶을 긍정한다. 피사체들은 하나같이 사소하거나 시들거나 낡았다. 하지

만 여전히 찬란하며 그렇기에 더욱더 평화롭다. 사진은 할머니의 일상만큼이나 고요하고 기억의 무게만큼이

나 가볍다. 작가의 시선은 할머니의 삶에 개입하기보다는 애틋한 관망을 이어나간다. 그것은 이미 지워진 역

사에 대한 존중이고 이제는 정착할 수 없는 기억에 대한 위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상과의 거리는 끝내 더 멀

어지지 못하고 할머니 주변을 서성이며 맴돈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곤 “그 몫이 온전히 당신 것

이어서 나는 자주 슬프기도 하다.”라고 낮게 읊조리는 것뿐이다.

 

주용성은 죽음과의 거리를 더욱 극적으로 확장한다. 얼핏 봐도 영정사진으로 보이는 사진들이 액자에 담겨 노

란 끈으로 묶인 채 검은 바닥에 놓여있다.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열사들이다. 그리고 이 사진에 붙은 ‘민족민주 열사 및 희생자 추

모제’라는 설명이 추모제를 마치고 그들의 영정을 정리하는 상황임을 짐작게 한다. 하지만 작가의 시선은 열

사들의 죽음에 대한 숭고를 단번에 걷어낸다. 그리고 민주화 투쟁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하나의 물질로 치환한

다. 이 과정에서 많은 상징이 중첩되고 왜곡된다. 우선 작가는 한 시대의 투쟁이 시간이 흐른 후 추모라는 형

식적 의례로 변질하는 과정을 폭로한다. 언제나 현재형일 수 밖에 없는 민주주의라는 가능태를 과거화 시키고

투쟁의 종료를 선언하는 제의적 형식에 대해 작가는 묻는다. 그와 동시에 민주화세대라는 한 시대가 종료되었

음을 선언한다.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인물들이 대통령이 되고 각 요직을 차지했지만 그들은 지금의 젊은 세

대에게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쟁의 시스템을 강요했고 비정규직이라는 괴물을 선사했다. 그 젊은 세대 중 한

명인 작가에게 그들이 말하는 민주화의 시대는 또 다른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적 죽음-이미지와의 극단

적인 거리 두기는 대상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드러내는 역설적 상황을 생산한다.

 

주용성의 사진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죽음은 사진의 죽음이다. 영정사진은 어떤 이의 죽음을 선언하고 추모

제의 종료와 함께 제 쓸모를 다했다. 싸구려 노란 노끈은 얄궂게도 열사들의 눈을 가리고 입을 막았다. 과거의

한 시공간을 가리키던 얼굴은 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우연히 놓였다. 그 상황을 작가는 다시 사

진으로 찍어 그 과정마저 박제화시킨다. 중첩된 사진의 죽음이다. 배경의 별처럼 빛나는 스티로폼 조각들은

제단으로써의 용도를 다하고 이 죽음의 연쇄를 더욱 증폭시킨다. 이 빛나는 흔적들은 윤승준의 겨울 산과 닮

았다. 윤승준의 사진에 드러난 휴게소 풍경은 모두가 메마른 겨울 산을 등지고 있다. 곧 눈이 녹고 봄이 올 것

을 모두가 의심하지 않는 것 만큼이나 사진 속 휴게소의 운명은 명확하다. 홍진훤의 사진에서 반복적으로 나

타나는 흐린 하늘도 같은 관계에 놓인다. 늘 붐비고 화려하기만 했던 제주의 관광지들은 이 하늘 아래 갇힘으

로써 일정한 톤을 갖게 되고 이는 하나의 징후로 작동하게 된다. 세월호 이후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이 좌절된

어떤 감각처럼.

 

현다혜의 빛은 더욱더 특이하다. 대부분 사진에서 대상들은 매우 강한 빛 아래에 있지만 한 장의 사진을 제외

하면 모두 그렇다 할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빛이 때로는 자연광이고 때로는 인공광이지만 그것과 상

관없이 사진들은 모두 명암 없이 미끄러진다. 과거는 기억 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것이라면 현재만 존재하

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림자 없는 사진 안에서 한층 도드라진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 할

머니의 과거 증명사진이라는 점은 더욱더 의미심장하다. 현다혜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화사한 꽃들과 윤승

준의 사진에서 등장하는 마른 풀들은 묘한 동질감을 생성한다. 한 시대의 판타지를 대변하는 휴게소의 이름들

은 열사들의 영정 속 이름과 어렴풋이 겹쳐진다. 영정사진 속에 간혹 등장하는 무심한 운동화는 윤승준의 관

조적 시선과 다시 만나고 세상과의 마지막 끈일지도 모를 할머니의 붉은 휴대폰은 제주에 도달하지 못한 아이

들의 마지막과 닿아있다.

 

여기 네 개의 사진 덩이가 놓여있다. 마치 무덤과 같이. 사실 무덤은 죽음과 상관없지만 우리는 무덤을 세우며

죽음을 가시화한다. 죽음을 시각화하는 몹쓸 버릇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얽히고설킨 이 사진들 역시 각

자의 방식으로 어떤 죽음을 바라보게 한다. 다섯 번째 4월이 돌아왔다. 시간의 마디에 상징을 붙이는 식상한

일을 그만두고 싶어도 도무지 그것을 덮을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4월은 죽음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렇다. 별은 죽음을 맞이할 때 가장 밝게 빛난다. 두 개의 달이 뜨는 날 하나의 우주가 소멸한다. 이 잔인한 진

실은 우리의 시선을 죽음으로 이끈다. 죽음을 바라보는 행위는 작든 크든 또 다른 세계로의 응시이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이고 사진의 유일한 쓸모는 그 그림자를 물리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이다. 이 무의미해 보이는 사진

적 행위들을 이리저리 겹쳐보며 우리에게 들이닥쳤던 죽음의 장면들에 대해 다시 곱씹어 본다. 그리고 우리가

곧 살아내야 할지도 모를 또 다른 어두운 우주를 떠올려본다.

 

Japanese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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